#1

'사회적 관계의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만 많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직장 동료들은 사루 종일 성심성의껏 대하다가, 저녁에 집에 와선 잔소리를 평소보다 조금 심하게 했다거나 열쇠꾸러미 챙기는 걸 깜빡했다는 이유로 솜씨 좋고 상냥한 아내를 매몰차게 면박 주는 남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도 그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매우 진지한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런 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사랑의 기초 - 한 남자> 中

 

 

#2

그녀는 나와 한 공간에 있을 때면 일상의 80%를 권태로운 표정으로 보낸다. 말투에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른 사람의 전화가 오면 (대부분은 친한 친구, 동기 동생, 친한 언니의 전화다) 갑자기 생기가 솟아오르면서 표정과 말투가 180도 바뀌어버린다. 그렇게 즐겁게 대화를 나눈 후 통화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렇게 생명력 넘친 적이 있었냐는 듯 다시 권태로운 모습으로 돌아와버린다. 그런 권태로운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나에게는 '사랑한다' 고 말을 한다.

 

 

#3

그녀는 내가 시댁 사람들과 단순히 '혈연' 관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이 무례한 행동을 한 것(정확히는 나에 대해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 70%, 본인에게 대해 한 것이 30%)에 대해 자신에게 미안해해야 하며, 자신이 내는 화를 기꺼이 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상황에서, 70%의 무례함은 나에게로 온 것인데, 내가 더 화가 나고 속이 상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결혼 후 그 사람들에게 데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화풀이 상대가 기꺼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화내고 흥분해서 쏟아내는 말을 온전히 다 받아주고 넙죽 엎드리길 요구한 것이다.

 

 

#4

나는 그녀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말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오히려 평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못'에 대해 관대하게 넘어가지만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않게 대한다며, 나의 말과 행동이 모순됨을 지적하였다. 올바른 지적인가?

단순히 같은 사안에 대해 나에게만 역정을 내고 감정의 쓰레기통 처럼 나를 대하는 것과, 올바름에 대해 함께 고민해나가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조언과 충고를 더 해주는 것이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일인가? 내가 조언을 하며 화를 냈다면, 그 비교와 비난은 충분히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를 내며 말한 적이 없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틀림을 굳이 지적해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그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이 더 이익일 것이고, 함께 평생을 지낼 사람과는 순간의 관계를 위해 올바름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평생을 위해 올바름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닌가? 그게 지금 단순히 화풀이 대상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과 동일선상에서 비교되어야 하는 일인 것인지, 나는 납득할 수가 없다.

 

 

#5

오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에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하루 대부분을 보냈다. 내가 도대체 어디서 어떤 실수를 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타이밍에서 그녀의 짜증은 폭발을 했고, 나는 하루 종일 그저 조용히 내 마음을 달래며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마음에 와닿았던 말은 아들의 '아빠는 잘못한 게 없어' 였다. 아들은 알지만, 나도 알지만, 그녀만 모르는 사실.

 

 

#6

그녀는 집에 돌아와서도 무기력한 모습으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아는 언니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하자 오늘 처음 들어본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내 마음 속에선,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나는 그녀에게 어떤 대우를 기대하고 있는 지에 대한 생각이 자라났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

 

 

#7

알랭 드 보통이 지적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말에 100% 동의할 순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매몰차게 대한다는 것은, 더 관심을 가져야지만 매몰차게 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스럽게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먼저 화낸 적이 없다. 단지 올바름에 대해선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금 더 엄격하게 적용했던 것은 맞다만... 그것이 매몰차게 대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8

나는 할 수 있지만, 상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믿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그 쓰레기가 넘치지 않도록 내 그릇을 더 넓고 깊게 만드는 것 밖엔 없는 것인지. 

 

 

#9

이렇게 답답한 순간엔 늘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 사람조차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 마음 속에 영원히 떠나가지 않을 것만 같던 그 사람이 이젠 정말로 흘러가버린 것만 같다. 사실은, 그 흘러감이 내가 정말로 원해온 것이긴 하지만.

Posted by 다크샤인